추모비 건립 특강 ...농암의 은퇴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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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비 건립 특강 ...농암의 은퇴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 금선정문학관(錦仙亭文學館)방명록

추모비 건립 특강 ...농암의 은퇴 / 이성원 금계 황준량 선생 탄신 500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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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21회 작성일 23-08-11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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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전별연은 도성에서 한강까지 동료, 벗들의 전별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본 도성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는 말이 나오게 했다. 기록에는 “한 때 전 조정이 텅 비었다”고 했으니, 거의 거국적인 행사였다. 『왕조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했는데, 기록은 이러하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이현보는 일찍 노부모를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여덟 고을을 다스렸는데 부임하는 곳에서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부모가 죽자 예를 다했고, 상례을 마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여러 벼슬을 거쳐 참판에 이르렀다. 하루아침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사대부들이 다투어 말렸으나 소매를 뿌리치고 하직하고는 배를 타고 유유히 떠났다. 배 안에는 오직 화분 몇 개와 바둑판 하나뿐이었다.

이현보의 고향 생활은 담박淡泊했다. 한가할 때 이웃사람을 방문할 경우 걸어가서 만났고, 스스로 농부로 자임自任했다. 집 앞에 큰 강이 있어서 배를 띄울 만 했다. 그래서 때로 손님이 오면 더불어 노를 저었다.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소요하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신선神仙과 같다고 했다."

『중종실록』권98, 37년 7월

구전 김중청金中淸은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그 누구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우리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풍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용퇴했다. 회재, 충재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金安國), 퇴계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가 떠날 때의 일 백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어찌 비유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라 했다.

농암의 정계 은퇴 모습은 장관이었다. 도성, 제천정, 두모포로 이어지는 전별연과 벗들이 삼전도, 저자도까지 따라오는 1박2일의 유래 없는 일이었다. 모재, 충재, 회재, 퇴계 등이 뱃길까지 동행했고, 풍기군수 신재(周世鵬)는 죽령고개에서 맞이했다.

절친했던 벗 모재는 이미 밤을 함께하며 이별시를 나누었고, 충재에게는 "한숨 쉬며 내 은퇴 부러워하여 한강 배에 까지 와서 이별했다( 吃吃羨我行 來別漢江舟-농암의 충재 만사)"고 했다. 회재 역시 장문의 전별시를 지었으며, 퇴계는 3일 동안 거듭해서 시를 썼다. 회재의 전별시 일부는 이러하다.

軒冕羽輕忠孝重 벼슬은 가볍고 충효는 무거운 것

能知輕重世無人 세상사람 누가 그 경중을 아는가

靑春連佩八州印 청춘에 여덟 고을 역임했으며

華髮猶存百歲親 백발에도 100세 어버이가 계시네

此去戱班心更展 이번 길 진정 색동옷의 효도를 할 것이며

他年投釣道應伸 다른 해 낚시 줄 던지며 도를 펼 것이다.

堂開愛日人咸慕 애일의 집은 누구나 찬양하는 일

駐景椿庭信有因 빛나는 효도마당 진실로 뜻이 있네.

叨陪遊賞今難再 모시고 유상함이 이제 다시 어려우니

一別悠悠隔幾秋 이별 후 언제 다시 뵈울까

浩然歸興挽無由 호연한 귀거래 만류할 수 없으니

魂夢先尋某水邱 꿈속에 모수모구某水某邱가 먼저 보이네

농암은 이 무렵 온계 이해李瀣와 퇴계 형제에게 '분어행盆魚行'이라는 시를 지어주며 정계를 물러나라고 종용했다. 이 시는 당시 관료들을 어항 속의 물고기에 비유한 특이한 형식의 시로, 정국동향의 구조적 비극성을 예리하게 진단하고 있다.

농암은 이 시에 "어항 속 물고기들 자유를 즐기지만, 그 장소를 얻은 것은 아니다(盆中遊自恣 然非得其所)."라고 했고, 퇴계는 화답和答 시에 “깊은 훈계는 분어행에 있으니, 지극한 가르침 새겨 명념하리(深戒在盆魚 至誨當銘記).”했다. 그리고 ‘저도 물러나겠습니다.' 했다. 예상 밖의 권고이고, 예상 밖의 답변이었다.

이제 막 권부權府에 들어선 정3품 도승지 온계, 정4품 의정부사인 퇴계에게 누가 사퇴하라고 할 수 있을까. 권고도 쉽지 않고 수용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퇴계는 다음해 1543년 첫 은퇴를 감행했고, 1546년 또 물러났으며, 이후 진퇴를 거듭했다. 부르면 올라갔지만 '물러남'에 방점이 있는 처신이었다.

이런 퇴계에게 고봉 기대승奇大升은 한때, “선생님의 사퇴는 매우 잘못되었습니다.” 라고 날카롭게 공격한 바 있다. 퇴계는 이 공격에 대해 최후로 농암과 주자의 은퇴를 인증하면서, “고인들의 노병은퇴老病隱退는 자연스러운 일이였는데, 지금 사람들은 이런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고 개탄했다.

퇴계의 정치여정에서 정암의 사사처형이 비극적 한 장면이라면, 농암의 은퇴전별은 감동적 한 장면이었다. 퇴계는 3일의 일정을 함께했다. 의례적으로 많은 7편, 14수의 전별시를 지었다. 제목도 '李參判先生暇歸將因以乞身‘', '奉餞李先生' 이라는 거의 사용하지도 않은 어휘를 순간 쓰고 있다. 현직 참판에게 선생이라 했다. 또 따라가고 싶다고 간절히 피력했다.

퇴계에게 농암의 은퇴는 한 명의 참판 관료의 치사致仕가 아닌, 한 분 선생의 역사적 사건의 한 순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저 중국의 전설적인 현인 소광, 소수와 비견된다고 했다. 퇴계의 전별시 한 수는 이러하다.

上東門外候功成 소광疏光의 은퇴처럼 공은 이미 이루어졌고,

祖帳如雲感後生 전별인사 구름 같아 후생을 감동시키네.

白日登仙何足道 맑은 날 신선이 되어 오르니 어찌 말로 다하랴,

急流空羨此閑行 급류시절, 어떻게 이런 명예로운 은퇴가 있을까.

퇴계는 생애 무엇이 되고자 함이 없었다. 단 하나 소망이 있었다면 신선神仙이 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그 신선은 관직을 은퇴하면 된다고 했다. 은퇴하는 농암에게 ‘신선이 되어 오른다.’고 하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신선’이라 했다.

퇴계의 신선은 물론 도가적 신선이 아닌, 자연과 인생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와 자족의 절대 경지를 말한다. ‘求道之士’와 ‘知足之士’를 추구한 분이 퇴계였고, 실재로 자득自得한 분이 퇴계였다.

이치억 박사는 퇴계종택 차종손이다. 퇴계 종손답게 전공이 바로 퇴계이다. 학위도 퇴계를 연구하여 받았고, 대부분 논문도 퇴계를 쓰고 있다. 그 논문들은 매우 우수 하다. 무거운 주제를 가볍고 명쾌하게 쓴다. 자료축적에 가까운 기성 논문과는 판이하다. 그야말로 ‘글’을 쓴다.

가령 ‘仁’의 설명을 “인은 사랑이 아닌 사랑의 씨앗”이라 한다든지, 종택의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도 그 방향을 아주 자연스럽게 쓴다. 체험을 바탕으로 소설식의 글을 쓴다. 그래서 글이 발표할 때마다 주목을 받는다. 필자도 그렇게 쓰고 싶으나 도무지 역부족이다. 퇴계 연구의 제1인이 되기를 진정 기대해 마지않는다.

아래 이 박사의 논문 한 대문을 소개한다. 제목도 “그 자체로 가치 있고 즐거운 자족의 삶이어야”이다.

“퇴계는 무언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 등을 ‘얻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되어야겠다.’ 고 공공연하게 말했던 것이 하나 있다. 이외로 그것은 ‘신선神仙’이다. 신선을 갈망하는 마음은 그의 글 곳곳에서 발견된다.

(퇴계가 금계에게 보낸 편지 글에) ‘지상에 스스로 신선이 있으니, 관직을 버리고 은퇴하는 날이 바로 신선되는 날입니다. 어찌 적성산 아래에서 연단鍊丹을 해야만 신선이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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