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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황씨의 역사- III편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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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1회 작성일 26-02-16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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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 황씨의 기원

평해 황씨는 물론이고, 한국의 거의 모든 황씨는 중국 한나라 사람 도시조 황락(黃洛)으로부터 계를 이어왔다.

황락(黃洛)의 선조

중국의 삼황오제인 황제 헌원씨(黃帝 軒轅氏)의 손자가 전욱 고양씨(顓頊 高陽氏)이고, 이 전욱의 현손이 요순시대에 살았던 혜련(惠连)이다. 제요 도당씨(帝堯 陶唐氏)는 혜련에게 황하의 치수를 맡겼고, 보상으로 황(黃)이라는 성과 운(云)이라는 이름 그리고 삼호(参胡, 현재의 섬서성 펀양시)땅을 받아 황나라(黃國)를 세웠다.

황나라는 춘추전국시대인 BC 648년에 초나라에게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전한시대에, 황씨들을 형주 강하군(현재는 후베이성 우한 일대)으로 이주시켜 살게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춘추전국시대 사군자 중 한 명인 초나라 춘신군 황헐(黃歇)과 한나라 말의 촉나라 황충(黃忠), 오나라 황개(黃蓋), 촉나라 제갈량의 부인 황씨(黃氏)가 있다. 대표적인 지명으로 황석(黄石), 황강(黃冈), 황학루(黄鹤楼) 등이 있다.[11]

황락(黃洛)의 일생

황락(黃洛)은 전한(前漢) 성제(成帝) 건시(建始) 3년(BC 30년) 신묘(辛卯)년에 출생하여 수화(綏和) 1년(BC 8년) 계축(癸丑)년에 입신하고,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4년(28년) 무자(戊子)년에 대장군(大將軍) 강하후(江夏侯)로 봉해졌다. 이후, 한나라 때 사신으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으로 표류하여 당시 고구려 땅인 근을어현(斤乙於縣 :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에 이르렀고 이후 이곳에 정착했다. 황락(黃洛)의 일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울진군 기성면 척산3리에 위치한 문절공황서신도비명(文節公黃瑞神道碑名)에 기록되어 있다.

시조의 표류지인 월송정(越松亭) 자리는 원래 신라시대에 화랑들이 무예를 단련하던 곳으로 고려시대에 월송정이 건축되었다. 또한 도시조 황락(黃洛)을 기리는 제단인 시조단이 월송정 바로 옆 소나무 숲에 위치한다.

황락의 후손 중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 삼형제가 있었는데, 첫째 갑고는 기성군(箕城君), 둘째 을고는 장수군(長水君), 셋째 병고는 창원백(昌原伯)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평해 구씨와의 관계

조선 후기 현종 때, 정시술이 저술한 『동국제성(東國諸姓)』과 1927년 일제강점기 최종해가 저술한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에 따르면,

중국 후한 때, 육종(陸終)의 먼 후예(後裔) 중에 해(海), 락(洛), 호(湖) 3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둘째인 황락(黃洛)은 중국 후한 유신이었다. 서기 28년(후한 광무제 건무 4년, 신라 유리이사금 5년) 구대림(丘大林) 장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지금의 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풍랑을 만나 길을 잃고 망망대해를 헤매던 중, 신라의 동북 해변인 평해읍 월송리 굴미봉(崛尾峰) 남쪽 기슭 월송봉(越松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이 지금의 월송정(越松亭)이다. 그 후 황락(黃洛)은 신라에 귀화함으로써 평해에 정착하여 황장군으로 불리며 살았으며, 한국 황씨(黃氏)의 도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지금도 평해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있다.

황락과 같이 신라에 온 구대림(丘大林)은 평해 구씨의 시조가 되었고,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다만, 평해 구씨 기록으로 보면 구대림(丘大林) 장군은 당나라 사람으로 663년(신라 문무왕 3) 일본에 사신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으로 되어있어 기록이 상이하고 시기가 후한이 아닌 당나라이다. 그래서 황락과 구대림이 같은 시대에 한반도로 넘어왔다는 기록은 허구로 보여진다.

본관의 역사

평해(平海)는 현재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평해읍(平海邑)이다.

  • 삼국시대

원래 고구려의 땅으로 이름이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평해(平海)로 이름이 바뀌어 유린군(有隣郡)의 영현으로 삼아 평해현(平海縣)이라 하였다.

  • 고려시대

고려 현종 때 소속을 바꾸어 예주(禮州)의 영현인 평해현(平海縣)이 되었고, 1172년(고려 명종 2년)부터는 지방관인 감무(監務)를 파견하기 시작하였고, 충렬왕 때는 문하시중 황서(黃瑞)의 공을 높이사, 본관인 평해현(平海縣)을 평해군(平海郡)으로 승격시켜주었고, 지군사(知郡事)를 파견하였다.

  • 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 1466년(세조 12년)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울진군 평해면이 되었고, 1963년에는 울진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9월 1일 기성면(箕城面)이 평해면에서 분리되었고, 1980년 평해면이 평해읍(平海邑)으로 승격되었다.

주요 유적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에 위치한 누각으로, 관동팔경 중 하나. 3대 황씨인 평해 황씨, 장수 황씨, 창원 황씨의 3대본. 고려시대에 세워짐. 우리나라 황씨의 시조인 황락(黃洛)의 표류지에 세워진 누각. 과거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말을 무예를 연마했고, 평해 황씨를 명문가에 올려놓은 고려 문하시중 황서(黃瑞)가 평해현을 평해군으로 승격시키며 건축되었다는 설이 유력. 일제 말기에 주둔 해군이 파괴하고 1980년에 다시 세워짐. 누각에 올라가면 한 눈에 보이는 동해바다 경치와 이를 액자처럼 감싸는 해송(바다 소나무)이 일품임.[12]
  • 시조단(始祖檀)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 월송정 바로 옆 소나무 숲에 위치. 조선 후기 숙종 때, 세워진 제단. 우리나라 모든 황씨의 시조인 황락(黃洛)을 기리기 위해 황락이 터를 잡은 곳에 조성.[13]
경상북도 영주시에 위치한 고택. 고려에서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살다가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을 낳고 기른 곳으로, 이후 사위인 미균(米均) 황유정(黃有定)에게 물려주었고, 한성판윤, 예조전서, 공조전서, 형조전서를 지낸 황유정(黃有定)이 병을 이유로 낙향하여 말년을 보낸 고택. 다시 황유정은 사위 김소량(金小良)의 차남인 이조판서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에게 물려주어 3명의 판서가 살았다하여 삼판서고택이라 불림.[14]
경상북도 민속 문화재 제61호. 황락(黃洛)을 시조로 한 평해 황씨 3대본이 이곳에서 비롯. 과거에는 해월헌(海月軒)으로 불림. 경북 울진 기성면 사동리 동해안 자락에 위치. 평해 황씨 중 문절공파(文節公派) 중 해월공파(海月公派) 시조인 황여일(黃汝一)의 신위가 모셔져 있음.[15]
중종 1년(1545년)에 추보재(追報齎)라는 이름으로 건립한 재사(齋舍) 건물. 황정(黃玎)의 학문과 효를 기리기 위해 지어짐. 1915년에 새롭게 서원 형태로 건물을 중건. 평해 황씨(平海黃氏) 불권헌공파(不倦軒公派) 문중에서 관리. 도봉서당 바로 뒤편 산기슭 헌안왕릉 바로 옆에 황정(黃玎)의 묘가 있음.
  • 황서 신도비(黃瑞 神道碑)
1980년 8월에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척산리에 세워진, 고려 후기 문신 황서의 신도비.[16]
  • 양무공사(襄武公祠) : 고려말 회군공신(回軍功臣), 조선초 2등 개국공신(開國功臣)인 황희석의 사당으로 평해군묘(平海君廟).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죽2리(원평)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

대표 인물

  • 황온인(黃溫仁) : 1세조(一世祖). 금오위 대장군과 태자검교(太子檢校)를 역임. 이후 벼슬을 그만두고 당시에는 기성(箕城)으로 불렸던 평해(平海)에 세거하였다.
  • 황우정(黃佑精) : 2세조(二世祖). 황온인(黃溫仁)의 아들. 고려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역임.
  • 황유중(黃裕中) : 3세조(三世祖). 황우정(黃佑精)의 아들.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 슬하에 황진(黃璡), 황용(黃墉), 황서(黃瑞)의 세 아들을 두었다.
  • 황진(黃璡)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첫째 아들.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역임. 평해 황씨(平海 黃氏) 검교공파(檢校公派)의 파시조.
  • 황서(黃瑞)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둘째 아들. 평해 황씨(平海 黃氏) 문절공파(文節公派)의 파시조. 충렬왕(忠烈王)때 세자를 위해 원나라에 세 번이나 다녀옴. 이후 충렬왕(忠烈王), 충혜왕(忠惠王), 충숙왕(忠肅王), 충목왕(忠穆王)의 4조(朝)에서 봉사하면서 원나라를 총 31번이나 다녀옴. 이 익대공훈(翼戴功勳)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금어대(金魚袋)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의 벼슬을 역임. 함께 본관인 평해현(平海縣)이 평해군(平海郡)으로 승격. 고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문절공(文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음. 조선이 들어서면서 고려의 기록이 많이 훼손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음. 1980년 8월 후손들이 울진군 기성면 척산 3리에 문절공 황서 신도비명(文節公 黃瑞 神道碑名)을 세워 문절공 윗대의 기록과 문절공 황서의 기록을 남겨 길이 전해지게 하였다.[17]
  • 황용(黃墉) : 4세조. 황유중(黃裕中)의 셋째 아들. 평해 황씨(平海 黃氏)의 충경공파(忠敬公派)의 파시조. 숭록대부(崇祿大夫)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을 역임. 시호는 충경(忠敬).
  • 황희석(黃希碩, ? ~ 1394년) : 8세조. 황천록의 아들. 고려와 조선에서 모두 공신으로 책봉. 고려말 우왕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1383년 함경남도 단주(현재 북한의 단천시)에서 이성계의 휘하에서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로 참전하여, 침략한 호발도(胡拔都)를 격퇴. 1388년(우왕 14년) 요동정벌군에 참여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회군하여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봉. 1392년 정몽주가 암살됐을 때 그를 지지하는 파를 탄핵하는 일을 맡았다. 개국 이후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에 제수. 1392년 10월 9일 개국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는데, 같은 해 11월 19일 태조의 특지(特旨)에 따라 개국 2등 공신으로 올려 책록되었다. 1394년 8월 3일 졸했다. 군호는 평해군(平海君). 시호는 양무(襄武). 아들은 황상(黃象), 황인(黃麟), 황난(黃鸞), 황곡(黃鵠) 4형제를 두었다. 사당은 평해군묘(平海君廟)로서 양무공사(襄武公祠)라 하며 충북 증평군 증평읍 죽2리(원평)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 있다. 검교공파에서 분파하여 양무공파(襄武公派)의 파시조가 되었음.
  • 황근(黃瑾) : 황진(黃璡)의 증손. 고려 공민왕 때 우헌납(右獻納)을 지냈다. 공민왕 11년(1362년)에 지진(地震)의 변고에 대하여 극론(極論)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리어 옥천 수령(沃川守令)으로 좌천되었다가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이르렀고, 후에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겸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을 지냄.
  • 황유정(黃有定,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 1421년),7세조 : 황근(黃瑾)과 문정공(文貞公)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딸인 순흥 안씨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 호는 미균(米均). 12세인 1355년(고려 공민왕 4년) 안동도회(安東都會)에 시를 지었고 이를 본 시관이 과거응시를 권유하였고 과게에 급제. 하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오직 글 읽기만 즐김. 특히 논어를 손에서 놓지 않음. 고려 말에 판윤(判尹), 예조전서(禮曹典書), 공조전서(工曹典書),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역임하고, 또한 조선 초에도 한성판윤(漢城判尹), 예조전서(禮曹典書), 공조전서(工曹典書), 형조전서(刑曹典書)를 역임하였다. 정도전의 여동생인 봉화 정씨 부인과 결혼한 정도전의 매제이다. 정도전 사후에 연좌되지 않고 벼슬을 계속하였다. 말년에 병이 생겨 경상북도 영주의 삼판서고택에서 지냄. 묘역은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 을좌지원(乙坐之原)으로 황분토(黃墳土, 덕동).[18]
  • 황현(黃鉉, 1372년 ~ ?) : 황유정의 둘째 아들. 조선 태종, 세종.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인수부윤(仁壽府尹),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 1393년(태조 2)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고, 1407년(태종 7)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서 중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에 초배(超拜)되었다. 태종과 세종 대에 대사성을 지냈으며, 1428년(세종 10) 인수부윤(仁壽府尹)을 거쳐 1429년 행성균대사성(行成均大司成)을 겸직하였다. 1430년 변계량(卞季良)과 함께 행성균대사성으로서 문과초시 때 강경(講經) 중 두가지 시제(試題)만을 뽑아 제술(製述)할 것을 건의,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여전히 초록집(抄錄集)에만 의존하고 경학(經學)을 경시한다는 건의에 따라 그 뒤 다시 과거에서 경서강독(經書講讀)이 시행되었다.
  • 황연(黃鋋) : 황유정(有定)의 셋째 아들. 선성현령(宣城縣令). 풍기로 이주하여 살았으므로 안동, 풍기, 영주, 예천, 봉화 일대에 평해 황씨가 번성하였다.
  • 황정(黃玎, 1426년 ~ 1497년) : 자는 성옥(聲玉), 호는 불권헌. 성종 5년(1474년) 49세에 사마시에 합격. 이후 사간원 정언, 경상도사를 지냈고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성종으로부터 청수(淸修)ㆍ염퇴(廉退)하고, 학문이 정숙(精熟)하여 사표(師表)로서 꼭 합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효심이 깊었으며, 청렴하였고 경학(經學)에도 밝았다. 경주 도봉서당은 원래 황정의 재사(齋舍) 건물이었다.
  • 황서(黃瑞, ? ~ ?) : 자는 정옥(廷玉). 황자중(自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전(詮)이고, 아버지는 황세통(世通)이며, 어머니는 윤질(尹晊)의 딸. 1552년(명종 7) 사과(司果)로서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같은 해 봉상시주부가 되어 전경(殿經)에 참여. 1555년(명종 10)에 사헌부지평. 그 후 예조정랑을 거쳐 다시 지평이 되었지만, 도망노비에 대한 처벌을 엄격하게 하지 않아 파직. 1556년 사간원헌납으로 복직. 이 후 병조정랑, 지평, 홍문관교리 겸 부응교를 역임. 1559년에 경상도에 어사로 파견. 이후 홍문관응교, 의정부검상 겸 사인, 홍문관전한을 거쳐 1564년 직제학. 이후 승정원동부승지 겸 예조참의, 우부승지 겸 좌부승지, 병조참지를 거쳐 1566년(명종 21)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가 되었다.
  • 황준량(黃俊良, 1517년 ~ 1563년) :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조선중기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이황(李滉)의 문인.[19]
  • 황여일(黃汝一, 1556년 ~ 1622) : 해월공파의 파시조.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황세충(世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연(璉)이며, 아버지는 유학(幼學) 응징(應澄)이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검열이 되었는데, 하번사관(下番史官)임에도 불구하고 출입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에 이어 장령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을 역임, 1611년(광해군 3)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해월집』 14권 7책이 있다.
  • 황만영(黃萬英, 1875년 6월 20일 ~ 1939년 4월 24일) : 독립운동가. 해월 황여일의 11대손. 1905년 성힉현 의진에 군자금 8백냥 지원. 1907년 신민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대흥학교(大興學校) 설립. 1912년 만주 신흥학교(新興學校) 재정 담당. 1925년 임시정부 참가. 1927년 신간회(新幹會) 울산지회(蔚山支會) 회장에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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