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沖齋博物館(충재박물관)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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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9회 작성일 23-08-24 06:13본문
[沖齋博物館(충재박물관) 현판]
[沖齋博物館(충재박물관)]
1980년대 중반에 국가보조금과 후선들의 성금을 모아
종가 경내에 작은 규모의 유물관을 지었으나 전시관리 및
주변경관과 관련된 여러문제로 인하여 2007년 현재의 위치에 재건립하였다.
얼마전 올린 봉화 靑巖亭(청암정) 바로 옆에 있는 충재박물관입니다.
靑巖亭(청암정) 게시물을 보시지 못하신 이웃님께서는 아래를 클릭하셔서 들려보셔요.
박물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각종 소장견적, 고문서, 유묵등 총5건 40종 482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3,000여 책의 전적을 포함한 각종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합니다.
[충재 권벌선생 불천위 제사상 전경]
자석으로 되어있으니, 만져보셔도 된다 합니다.
옮길수도 있겠지만, 다음의 관람객을 위해 그대로 두어야겠지요.
[충재 권벌선생 제사상 차림]
[박물관 입구]
충재선생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중종임금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중종 15년의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이곳 봉화의 닭실마을로 낙향하여 14년 세월동안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후, 중종 28년에 복직되었으나 乙巳士禍(을사사화)로 인하여
다시 파직되고, 56세에 밀양부사로 복직되었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압록강 끝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박물관 내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모두 겪는 험난한 시기를
살면서도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가
사화에 휘말렸고, 을사사화 때는 위정자의 실정을 비판하고 무고하게 귀양 간
대신들을 구명하려다가 또 다시 화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충재선생과 관련 안내판]
'忠(충)' 족자.
중국 명나라 태조의 글씨로 충재선생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 올 때 받아 온 것이라 한다.
선생의 5대손인 일로당 두광의 집안에 보관되어 오다가
박물관의 설립과 함께 기증 받은 것이라 한다. (기증자 권주섭)
[문정왕후와 충재 권벌선생의 독대장면 연출디오라마]
忠順堂(충순당)에서 義(의)를 지키다.
을사사화 당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을 위시한 소륜일파의 전황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 유간, 유민숙 등의 삼대성을 구하는 논지를
충심으로 간연하는 장면이다.
당시 올린 '忠順堂入對啓事(충신당입대계사)'와
'論救三臣啓(논구삼신계)'는 그 내용이 너무나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으며 그의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충재 권벌선생은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그 뒤 선조 때 그의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봉하읍의 三溪書院(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박물관 내 전시품]
張弼眞墨(장필진묵) 14×138.4 cm.
중국 명나라 때의 초서대가 東海(동해) 장필이 쓴 진묵 2폭과
權斗寅(권두인). 權斗經(권두경)의 識記(지기) 1폭 등 모두 3폭이다.
이 서첩은 1539년 권벌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구입한 것이라 한다.
[제례상 차림 전경]
[石泉精舍(석천정사) 현판]
석천정사는 16세기 중반 충재 권벌의 큰 아들인 청암 권동보가
초계 군수에 임명되었다가 향리로 돌아와 선대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창건한 정자로서 청암정과 함께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및 명승 제 60호이다.
춘양목으로 지어졌으며 주위는 기암절벽과 노송으로 장관을 이룬다.
[전시관 내 전시품]
박물관에는 보물 482점과 기타 유물 등 총 10,000여점에 이르는
조선시대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子孫의 寄贈으로 인해 소장유물의
수량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한다.
[충재 박물관 전경]
관람을 마치고 나오며 다시 담아 본 충재 박물관 전경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4-11-28 08:48:54 충재권벌선생에서 이동 됨]
[沖齋博物館(충재박물관)]
1980년대 중반에 국가보조금과 후선들의 성금을 모아
종가 경내에 작은 규모의 유물관을 지었으나 전시관리 및
주변경관과 관련된 여러문제로 인하여 2007년 현재의 위치에 재건립하였다.
얼마전 올린 봉화 靑巖亭(청암정) 바로 옆에 있는 충재박물관입니다.
靑巖亭(청암정) 게시물을 보시지 못하신 이웃님께서는 아래를 클릭하셔서 들려보셔요.
박물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충재일기 근사록을 비롯한
각종 소장견적, 고문서, 유묵등 총5건 40종 482점의 국가지정문화재와
3,000여 책의 전적을 포함한 각종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합니다.
[충재 권벌선생 불천위 제사상 전경]
자석으로 되어있으니, 만져보셔도 된다 합니다.
옮길수도 있겠지만, 다음의 관람객을 위해 그대로 두어야겠지요.
[충재 권벌선생 제사상 차림]
[박물관 입구]
충재선생은 원래 안동 출신으로, 중종임금 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나, 중종 15년의 己卯士禍(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된 후,
어머니의 묘소가 있는 이곳 봉화의 닭실마을로 낙향하여 14년 세월동안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 후, 중종 28년에 복직되었으나 乙巳士禍(을사사화)로 인하여
다시 파직되고, 56세에 밀양부사로 복직되었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압록강 끝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71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박물관 내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를 모두 겪는 험난한 시기를
살면서도 선비로서의 강직함과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가
사화에 휘말렸고, 을사사화 때는 위정자의 실정을 비판하고 무고하게 귀양 간
대신들을 구명하려다가 또 다시 화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충재선생과 관련 안내판]
'忠(충)' 족자.
중국 명나라 태조의 글씨로 충재선생께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 올 때 받아 온 것이라 한다.
선생의 5대손인 일로당 두광의 집안에 보관되어 오다가
박물관의 설립과 함께 기증 받은 것이라 한다. (기증자 권주섭)
[문정왕후와 충재 권벌선생의 독대장면 연출디오라마]
忠順堂(충순당)에서 義(의)를 지키다.
을사사화 당시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을 위시한 소륜일파의 전황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 유간, 유민숙 등의 삼대성을 구하는 논지를
충심으로 간연하는 장면이다.
당시 올린 '忠順堂入對啓事(충신당입대계사)'와
'論救三臣啓(논구삼신계)'는 그 내용이 너무나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으며 그의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충재 권벌선생은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그 뒤 선조 때 그의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봉하읍의 三溪書院(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박물관 내 전시품]
張弼眞墨(장필진묵) 14×138.4 cm.
중국 명나라 때의 초서대가 東海(동해) 장필이 쓴 진묵 2폭과
權斗寅(권두인). 權斗經(권두경)의 識記(지기) 1폭 등 모두 3폭이다.
이 서첩은 1539년 권벌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구입한 것이라 한다.
[제례상 차림 전경]
[石泉精舍(석천정사) 현판]
석천정사는 16세기 중반 충재 권벌의 큰 아들인 청암 권동보가
초계 군수에 임명되었다가 향리로 돌아와 선대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창건한 정자로서 청암정과 함께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및 명승 제 60호이다.
춘양목으로 지어졌으며 주위는 기암절벽과 노송으로 장관을 이룬다.
[전시관 내 전시품]
박물관에는 보물 482점과 기타 유물 등 총 10,000여점에 이르는
조선시대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子孫의 寄贈으로 인해 소장유물의
수량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한다.
[충재 박물관 전경]
관람을 마치고 나오며 다시 담아 본 충재 박물관 전경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24-11-28 08:48:54 충재권벌선생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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