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선비촌 중심인물... 안향, 안축, 안보, 정도전, 황유정, 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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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2회 작성일 23-09-05 17:50본문
1. 안향(安珦 1243-1306) : 본관 순흥. 고려 고종~충렬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초명은 유(裕), 시호는 문성공, 소수서원 제향 인물이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를 왕래하며 최초로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여 실천적 유학을 전파한 우리나라 성리학과 선비정신의 시조이다.
그의 사상은 제자인 육군자(권보·우탁·이진·이조년·백이정·신천)를 거쳐 이색·정몽주·이황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도학의 학맥을 형성시켰다.
그는 고려 후기 무신집권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불교의 부패와 무속의 성행, 몽고의 침탈 등으로 국내외적으로 위기가 가중되고 있던 때에 민족주의 및 춘추대의에 의한 명분주의, 한층 주지적인 수양론 등의 특성을 지닌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것이 바로 그의 이상이었으며, 이러한 이상을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하여 이룩하려 했다. 또한 그의 제자 추적(秋適, 1246-1317)은 『명심보감』을 편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유가사상에 기반한 인성교육 체계를 만들었다.
2.안축(安軸 1282-1348) : 고려 충렬왕~충목왕. 본관 순흥.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소수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영주 순흥의 세력 기반을 바탕으로 중앙에 진출한 신흥유학자로서 탁월한 재능으로 학문에 힘써서 글을 잘하였다. 충숙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춘추관 검열, 단양부 주부를 지냈다. 1333년 원나라 제과에도 급제하여 개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339년 충혜왕 때 전법판서, 감찰대부 등을 거치고, 1344년 충목왕 원년에 지밀직사와 첨의찬성사를 거쳐 감춘추 관사가 되어 충렬왕·충선왕·충숙왕 3조의 실록편찬에 참여했다. 성리학에 뛰어났으며 경기체가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의 작가로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 『근재집』이 있다.
3.안보(安輔 1302-1357) : 고려 충렬왕~공민왕. 본관 순흥. 자는 원지(員之), 소수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안축의 동생으로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였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귀국했다. 전법판서·밀직제학·감찰대부 등을 역임하면서 업무를 공정하게 잘 처리했다.
성격이 강직하고 청렴하여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으며, 도덕과 문장이 모두 시대의 사표가 되어 문하에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됐다. 목은 이색은 그의 묘지에서 “선생은 성품이 활달하고 사기를 즐겨 읽었으며, 일에 임함에 대체를 좇아 조금도 치우침이 없었고, 문장은 화려함을 버리고 뜻을 전달함을 취할 뿐이었다.”고 하였다.
4.정도전(鄭道傳 1342-1398) : 고려 충혜왕~조선 태조. 본관 봉화.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아들로 영주의 구성에서 태어났다. 이색(또는 진중길)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정몽주·이숭인 등과 교유했다. 1370년 성균관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강론했으나, 권신 이인임의 세력에 맞서다가 나주로 유배됐다. 1377년에 풀려나서 4년간 고향에 있다가 삼각산 밑에 초막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1383년 9년간에 걸친 간고한 유배·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당시 동북면도지휘사로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서 그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 건국의 기틀을 다지고 한양도성과 경복궁 건설의 초석을 놓았다. 선비와 백성의 나라를 꿈꾸며 불교를 배척하고 재상중심의 정치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이방원과의 대립으로 1차 왕자의 난 때 희생됐다. 『경제문감』, 『불씨잡변』, 『심문천답』, 『심리기편』, 『조선경국전』 등을 남겼다.
5.황유정(黃有定 1343-1421) : 고려 충혜왕~미상. 본관 평해. 초명은 지정(知定), 호는 미균(米균)이다. 안축의 외손자이자 정도전의 매부이다. 고려 말에 초계군수, 형조·공조전서를 지냈다. 초계군수 시절 단정·청렴하여 초계군민과 아전들이 오래도록 그 덕을 기렸다고 한다.
조선 초에 형조·예조판서를 지내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친 다음 노환을 이유로 낙향하여 영주의 구성 아래 동리의 자택에 ‘소쇄헌’이란 현판을 걸었는데, 이곳이 바로 그의 장인인 정운경에게서 물려받은 삼판서고택이다. 그는 이 저택의 두 번째 판서 주인이 되어 다시 외손자 김담에게 물려주었다.
6.안리(安理 1393- ? ) : 태조~미상. 본관 순흥. 호는 서파(西坡). 안향선생의 6대손으로 학문이 깊고 문장에 능하였으나 벼슬에 크게 뜻이 없어 학문에만 정진했다. 그의 명성을 듣고 조정에서 여러 번 벼슬을 내리니 계속 사양하지 못하고 1453년 외직으로 의령현감을 거쳐 예천군수에 나아갔다. 그러나 이때 세조가 단종의 보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순흥으로 낙향했다.
그는 순흥부 누암산 아래 자리 잡아 마을 이름을 대룡산이라 하고, 여기에 서파정을 지어 독서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서울에서 대신의 지위에 있던 집안 조카와 손자들이 그의 누추한 삶을 딱하게 여겨 철마다 맛있는 음식을 보내왔으나 소백산 나물만으로도 분수에 족하다고 하면서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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