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선비촌 중심인물...김응조, 주세붕, 황효공, 안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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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54회 작성일 23-09-05 17:49본문
13.김응조 (金應祖) 1587년-1667년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 또는 아헌(啞軒). 안동 출신. 할아버지는 장례원사의 김농(金農)이고, 아버지는 산음현감 김대현(金大賢)이며, 어머니는 수의부위(守義副尉) 이찬금(李纘金)의 딸이다.
17세 때 유성룡(柳成龍)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보고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1623년에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형제 9명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조정랑·흥덕현감·선산부사 등을 역임하고, 1634년(인조 12)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그 후 다시 지평(持平)·장령(掌令)·헌납(獻納)·수찬(修撰)·교리(校理)·부수찬·집의(執義)·사간·응교(應敎)·승지·호군·공조참의·대사간·한성부우윤 등의 관직을 인조·효종·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1637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출입하자 접대비 염출을 위해 삼분모회록법(三分耗會錄法)을 제안해 이를 시행하게 하고, 그 뒤 필요없게 되자 1658년(효종 9)에 폐지하게 하였다. 1638년에 장령으로 있으면서 8조를 건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명대의(明大義)’로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을 지지하고 절의를 고집하면서 교린을 가볍게 단절함을 비판하였다. 1651년(효종 2)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의 강(講)을 마치고,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됨을 개탄하고 학문 권장을 건의하였다.
1656년에는 예조참의로 있으면서 마음을 닦아 본성을 기를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사랑할 것, 문(文)을 숭상해 학문을 일으킬 것을 건의하고, 1659년(현종 즉위년)에는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행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4년에는 금성산성(金城山城)의 군량미 문제로 예조판서 홍중보(洪重普)와 병조판서 김좌명(金佐明)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은 삼조(三朝)를 시종한 신하로 나이 80세이며 먼 영남의 집에 있는 점을 고려해 사면하였다.
문장에 능했으며,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사집(鶴沙集)』·『사례문답(四禮問答)』·『산중록(山中錄)』·『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14.주세붕(周世鵬 1495-1554) : 연산군~명종. 본관 상주.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愼齋)·남고(南皐)·무릉도인(武陵道人)·손옹(巽翁), 시호는 문민공이다.
경남 합천(7세에 칠원으로 이주) 출신으로 풍기군수 재직(1541-1545) 때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설립해 성리학과 선비교육의 뿌리를 확립시켰으며, 사림으로 대표되는 선비정신을 널리 확산하는 데 초석을 다졌다. 또한 『죽계지』를 편찬하여 영주의 지역사에 관한 중요한 사료를 남겨주었다. 소수서원에 제향된 인물이다.
15.황효공(黃孝恭 1496-1553) : 연산군~명종. 본관 창원. 자는 경보(敬甫), 호는 구암(龜巖)이다. 1521년(중종 16)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성균전적, 형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황해도사·교리·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사간원 사간으로 있을 때 나세찬을 탄핵한 일과 생질이 권신들의 미움을 받은 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영주로 낙향하여 구암정사를 짓고 독서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도상학과 역학에 밝아 역범도를 완성했다. 퇴계와 교유하였으며 퇴계의 묘지명이 있다. 영주 사계서원에 배향됐다.
16. 안공신(安公信)[1496~1561]은 문과 급제 후 성균관직강·홍문관교리·청풍군수 등을 지냈다. 안공신의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대보(大寶), 호는 매담(梅潭)이다. 문성공 안향(安珦)[1243~1306]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를 지낸 안계문(安季文), 아버지는 진사 안영(安瑛)[?~1592], 어머니는 진사 박경원(朴慶元)의 딸 문의박씨(文義朴氏)이다. 안공신은 1528년(중종 23) 사마시‚ 1537년(중종 32) 문과에 각각 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직강을 거쳐 이조정랑·형조정랑을 등을 지냈다. 1556년(명종 11) 중시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봉상시부정과 청풍군수를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경상도 풍기군으로 돌아와 우우정(友于亭)[지금의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우우정은 안공신을 비롯해 여섯 형제가 함께 동거하면서 우애가 매우 지극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안공신은 향촌에 있으면서 이황(李滉)[1501~1570]과 함께 소수서원(紹修書院) 원규 및 운영 규정 제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안정(安挺)[1494~?]·황준량(黃俊良)[1517~1563] 등과는 사문입의(斯文立議)를 제정하여 서원의 재정과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안공신은 경상도 풍기군에 있으면서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죽계지(竹溪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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