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선비촌 중심인물...황준량, 박승임, 황응규, 배순, 김륵, 이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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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8회 작성일 23-09-05 17:47본문
23.황준량(黃俊良 1517-1563) : 중종~명종. 본관 평해.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퇴계의 문인이다.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로 임명되고, 호조·병조좌랑을 거쳐 중종실록과 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51년경 신녕현감 재임시 굶주린 백성들을 잘 구휼하면서 문묘를 수축하고 백학서원을 창설했다. 성주에서도 영봉서원과 문묘의 중수, 공곡서당과 녹봉정사의 건립을 추진하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영주 우곡서원과 신녕 백학서원에 배향됐다.
24.박승임(朴承任 1517-1586) : 중종~선조. 본관 반남. 자는 중보(重甫), 호는 소고(嘯皐), 퇴계의 문인이다.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예문관·승정원·홍문관 등에서 여러 청환직을 거쳐 이조좌랑·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소윤의 횡포가 심할 때는 벼슬을 사직하고 귀향하기도 했다. 학식이 풍부하면서도 과묵하여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했다. 특히 『논어』와 주자서(朱子書)를 탐독했으며,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두었다가 스승인 이황에게 질문하여 실력을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여 한때 많은 시를 지었지만, 중년 이후로는 사람을 천박하고 경솔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이를 중지하고, 심학에 주력하여 실천적 수행에 힘쓰면서 후진들을 양성했다.
『성리유선』·『공문심법유취』·『강목심법』·『소고문집』 등이 있다. 영주 구산정사에 배향되었다.
25.황응규는 1518년(중종 13) 한양 동리(東里)에서 출생하였다. 1543년(중종 38)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태학에서 황응규를 추천하여 전함사별제와 장흥고직장에 제수되었다. 1569년(선조 2) 알성시 문과에 급제, 전생서주부에 임용되고, 호조·형조·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72년 인제현감에 제수되었으나, 1573년 파직당하였다. 1575년 청도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애민비를 건립하였다. 황응규는 1579년(선조 12)에는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고을의 폐단을 바로잡고 농민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황응규 선정에 감복한 백성들이 조정에 요청하여, 임기가 완료되었음에도 1년을 더 재임하였다. 1585년 사섬시정에 제수되었고, 1588년(선조 21)에는 사직하고 고향인 경상도 풍기군 백동[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백리]으로 내려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고, 1594년(선조 27)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또한 향병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의기를 고취하고, 장정·군량 등을 모집하는데 진력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26.배순(裵純 1534~1614) : 중종~미상. 수철장(대장장이)이며 ‘충신백성’으로 추앙됐다. 사람됨이 성실하고 거짓이 없었으며 집안 교육에는 매우 엄격했다. 수철장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그릇이 갈라져 있거나 물이 새면 가격을 정직하게 낮추어 판매했다. 양봉을 매우 좋아해 벌통이 수십 개에 이르렀는데, 벌을 잘못 죽일까 염려해 함부로 꿀을 따내지 아니했고, 반드시 때에 맞게 숟가락으로 그 맑은 것만을 대충 취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예안에 거주할 때 퇴계의 행실을 익히 듣고 성심으로 사모했는데, 풍기로 이주해 퇴계의 상에 삼년 동안 심상(心喪)을 하고, 철로 된 상(像)을 주조하여 제사를 올렸다.
선조가 승하하니 74세의 고령에도 삼년복을 입었고, 복을 마치자 담제(禫祭)를 지냈다. 풍기군수 이준(李埈)이 수령으로 있으면서 관찰사에게 전보하고 관찰사가 조정에 계문해 마침내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그가 대장간을 차려서 살던 곳이라 하여 배점리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순흥 배점리에 정려비가 있다. 단곡집과 창석집에 열전인 배순전이 수록돼 있다.
27.김륵(金玏 1540-1616) : 중종~광해군. 본관 선성.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이다. 김담의 현손으로 박승임과 황준량에게서 수학하고 퇴계의 문인이 되었다. 30세에 이미 학문과 인격으로 사림에 추중되어 34세로 이산서원장에 추대됐다. 1576년(선조 9) 식년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 전적, 정언을 거쳐 지평을 역임했다. 1584년 영월군수에 부임하여 군수가 부임하면 갑자기 죽는다는 괴소문을 듣고 단종릉에 제문을 지어 제사했다. 또한 단종의 사당을 세워 위패를 봉안하고 고을의 묵은 폐단 10가지를 들어 ‘영월군진폐소’를 올려 민생을 안정시키자 그가 임기를 마치고 떠나갈 때 군민들이 선정비를 세워 기렸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안집사로 내려가서 선비들에게 국가의 뜻을 알리고 왜적 토벌을 지휘했다. 명나라 하절사로 가서 일본의 재침 방지를 위한 칙서를 보내게 했다. 이조참판, 홍문관부제학,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1604년 안동 대도호부사에 부임했다. 이듬해 7월 큰 수재를 입은 안동부를 구제하여 군민들이 송제사적비를 세워 그를 기렸다. 영주 구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영주 구성 서편에 그가 지은 구학정과 자택이 있었다고 한다. 『백암선생문집』이 있다.
28.이덕홍(李德弘 1541-1596) : 중종~선조. 본관 영천.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이다. 영주 남촌 구룡동(현재의 장수면 호문리)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역학과 산학에도 정통하여 선기옥형(璇璣玉衡)과 혼천의를 제작했다. 1578년(선조 11) 조정에서 학행이 높은 선비 아홉 사람을 천거할 때 4위로 뽑혔으며, 임진왜란 때는 세자를 따라 성천까지 호종했다.
이때 상소문에 귀선도를 첨가하여 바다에서는 거북선, 육지에서는 거북거를 사용할 것을 진언했다. 특히 그가 임진왜란을 만나 거북선의 원형설계도로 추측되고 있는 ‘귀갑선도’를 제작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주역질의』·『사서질의』·『계산기선록』·『주자서절요강록』·『간재집』 등이 있다. 영주 오계서원에 배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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