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선비촌 중심인물...이여빈, 성이민, 김응조, 홍우정, 전익희, 정언숙 > 錦仙 선비자락 소식

본문 바로가기

서브이미지

영주 선비촌 중심인물...이여빈, 성이민, 김응조, 홍우정, 전익희, 정언숙 > 錦仙 선비자락 소식

영주 선비촌 중심인물...이여빈, 성이민, 김응조, 홍우정, 전익희, 정언숙

페이지 정보

작성자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0회 작성일 23-09-05 17:45

본문

35.이여빈(李汝馪 1556-1631) : 명종~인조. 본관 우계.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이다. 한우(韓佑)와 박승임 문하에서 경서와 역사, 제자백가서까지 두루 섭렵했다.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벽사도찰방으로 나갔으나 노모 봉양을 위해 일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황의 문묘종사 반대와 인목대비 폐비를 추진하는 이이첨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그뒤 벼슬을 단념하고 영주 감곡에 은거하여 후진교육에 힘썼다. 1625년 이산서원 원장의 신분으로 고을 선비인 박성범·김여욱 등과 더불어 영주의 사적을 수집하여 최초의 영주향토지인 영주지(취사본)를 편찬했다. 그는 영주지 서문에서 지방향토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본군이 한 도의 두 번째 고을이 되어 유능한 인재들이 수없이 배출되었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훗날 본 고을의 민속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채록할 수가 없게 된다면 어찌 한 고장의 흠결이 아니겠는가!”라고 편찬 동기를 밝혔다. 이를 통해 영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그의 자긍심과 그러한 영광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필생의 의지를 잘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영주의 역사를 현단계까지 정리하여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이여빈의 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도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취사문집이 있다.

 

 

36.성이민 (成以敏) 156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퇴보(退甫), 호는 삼고당(三古堂). 대사헌 성세정(成世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윤(成倫)이고, 아버지는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 성효관(成效寬)이며, 어머니는 심사공(沈思恭)의 딸이다. 참의 성이문(成以文)의 아우이다.

1595(선조 28) 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유학(儒學)으로서의 장원은 좀처럼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주위의 촉망을 받고 시관(試官)을 위하여 경연(慶宴)까지 베푼 일이 있었다.

이듬해 호조좌랑이 되어 명나라 장수 진운홍(陳雲鴻)의 접반관(接伴官)을 겸하였으나, 적의 정세에 관하여 올린 장계(狀啓)로 인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었고, 이어 심유경(沈惟敬)이 접반관으로 있을 때는 왜군의 진영(陣營)에서 도망해 온 죄로 유배됨으로써 거듭 어려움을 겪었다.

1606년 공조정랑을 지낸 뒤 한산군수로 전임, 승계(陞階)되었으나 1609(광해군 1) 병조정랑의 자리에 천거에 의한 물망에 올랐을 때 능력에 맞지 않다 하여 왕명으로 물망에서 제외되는 등 벼슬길이 순탄하지 못하였다.

 

37.김응조(金應祖 1587-1667) : 선조~현종. 본관 풍산.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이다. 성혼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대현의 여섯째 아들이다. 영주 봉향리(현재의 휴천동)에서 태어나서 일찍이 권두문, 권호신에게 글을 배우고 16세 때는 류성룡에게서 수학했다.

1613(광해 5) 생원시에 합격한 후 광해군의 난정에 과거를 포기하고 장현광의 문하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1623(인조 원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 사간헌 헌납, 홍문관 부교리, 사간원 사간, 승정원 부승지 등을 역임했다. 영주의 향토지인 영주지(학사본)를 편찬하여 이여빈의 취사본 영주지의 내용을 보강됐다. 안동 물계서원, 영주 의산서원에 배향되었다. 학사집·사례문답·산중록·변무록등이 있다.

 

38.홍우정(洪宇定, 1593~ 16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남양 홍씨로, 홍선행을 시조로 삼는 토홍이다.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이다. 할아버지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해 청난 일등공신이 되고 형조판서를 지낸 홍가신이며 아버지는 홍영, 어머니는 양천 허씨 이조판서 허성의 딸이다. 허성은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맞형이며,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전 일본에 통신사로 간 서인 황윤길과 함께, 왜군이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다가 옥고를 치루었다. 할아버지 홍가신은 선조때 홍주 목사로 있으면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부원군에 봉해진 홍가신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을 역임하고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된 홍영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허성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허성은 허난설헌의 오빠이며,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형이다. 할아버지 홍가신이 하루는 꿈을 꾸는데 길몽을 꾸고, 손자중 탁월한 문장가가 날것이라는 예견을 하였는데 이후에 홍우정이 태어났다. 홍우정은 이미 나이 어릴때부터 문장을 인정받았는데, 10세 무렵에는 이미 문장을 짓기 시작하여, 주변사람들에게서 놀랍다는 칭찬을 듣기 시작하였다. 동생은 이조판서, 공조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존된 남인 계열 홍우원이다. 다른 동생 홍우량은 제주목사를 지낸 청백리로 유명하다.

 

39.전익희(全益禧 1598-1659) : 선조~효종. 본관 옥천. 자는 자수(子綏), 호는 설월당(雪月堂)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하여 장령 김지복에게 배우다가 류성룡의 문인 정경세에게서 수학했다.

162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정자, 형조·예조좌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역임했다. 간관으로 있으면서 권신 김자점의 죄를 탄핵하다 함경도사로 좌천되었다.

이로부터 충청도사·선산부사를 거쳐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지방장관으로 있으면서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고을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30여년간 관직생활에서 한결같이 청렴·공직하여 물려받은 세업조차 줄일 형편이었기에 만년에는 살림이 궁색할 지경이었다 한다. 영주 방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설월당문집이 있다.

 

40.정언숙(丁彦璹1600-1693) : 선조~숙종. 본관 나주. 자는 군서(君瑞),호는 검암(儉巖) 또는 수고헌(壽考軒)이다. 162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의금부도사, 사옹원 직장, 사헌부 감찰, 호조좌랑을 거쳐 안동판관, 삼가현령, 형조좌랑, 영덕현령 등을 역임했다.

그는 관직생활 동안 공정함을 지켜 사사롭거나 치우침이 없었으며, 한결같이 청렴하여 자손을 위해 토지를 장만하는 일이 없었다.

자녀들 혼수차림은 가난한 선비집과 같았고 그 자신이나 자손을 위해 청탁하는 법이 없었다. 1635년 안동판관으로 있다가 원주로 돌아가면서 영주의 경관에 매료되어 줄포에 자리잡아 김응조 등 고을선비들과 교의를 맺었으며 봉강서당을 지어 후손들 교육에 힘썼다. 검암시집이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사명 (주)스피드레이저기술 주소 경기도 광명시 하안로 108 에이스광명타워 208호 사업자 등록번호 119-86-49539 대표 황병극 전화 02-808-3399 팩스 02-6442-7601